저는 화나고 짜증 나는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 일종의 덕목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자기 뜻을 분명히 말하는 사람이고,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의사 표현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차이는 타고난 성격에서 온다고 믿었고, 저는 화를 자주 내지는 않지만 한번 나면 불같이 나는 성격이라고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화가 나는 건 다른 사람이나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문제가 없고, 누군가 저를 화나게 했을 뿐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이 블로그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가 보려는 제 기록입니다. 바깥을 고치기 전에 잠시 앉아서, 머릿속을 채운 생각을 내려놓고 지금 제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보는 연습입니다. 제가 왜 앉게 되었는지는 달라진 것은 마음뿐이었다에 따로 적어 두었습니다.
목차
생각을 내려놓는다는 것
명상이라고 하면 흔히 조용한 음악을 틀어 놓고, 안내하는 목소리에 따라 숨을 고르며 눈을 감고 편히 쉬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안내를 따라 무언가를 떠올리거나 지난 일을 되돌아보는, 일종의 치유 시간처럼 말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명상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앉아 보니 처음에는 생각이 마구 쏟아졌습니다. 지금도 욕심이나 화, 어리석음(탐진치)이 마음에 남아 있는 날에는 하고 싶지 않아도 생각이 올라옵니다.
제가 이해한 ‘생각 내려놓기’는 생각을 억지로 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떠오르면 ‘생각이 떠올랐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따라가지 않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단순한 동작을 수천 번 반복하는 것이 지금 제 수행의 대부분입니다.
앉아서 지켜보니 생각은 이렇게 흘러갔습니다. 먼저 무언가를 하려는 마음이 일어나고, 그것을 실마리로 지난 기억과 몸에 밴 습관을 찾아갑니다. 그러면 그때의 감정까지 함께 되살아나고, 저는 지금까지 길들여진 대로 반응합니다.
그런데 알아차리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다 보니 생각 사이에 틈이 생겼습니다. 그 틈에서 마음이 막 일어나는 순간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거기서 알아차리면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고 감정에 휘말리는 일도 사라졌습니다. 그 틈이 남 탓 대신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명상의 시작이자 전부입니다. 알아차림으로 깨어 있는 상태, 다시 말해 무념이든 호흡이든 한 곳에 집중해 머물되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상태를 이어 가면, 삼매도 공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머물렀고, 그렇게 보았습니다.
왜 ‘부처의 가르침’인가
제가 따르는 명상은 부처가 직접 가르친 내용을 기록한 가장 오래된 경전, 빨리어 니까야에 바탕을 둡니다. 대표적인 것이 호흡을 지켜보는 방법을 16단계로 설명한 「들숨날숨 마음챙김 경」(맛지마 니까야 118번)입니다. 다만 가장 오래된 경전에만 머물지 않고, 대승과 선(禪)의 말씀도 출처를 밝혀 함께 읽습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어느 전통이냐가 아니라, 의례와 겉치레를 덜어 낸 부처의 가르침 그 자체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경전을 뿌리로 삼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 방법이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앉고, 무엇을 보고, 어떤 단계를 거치는지 실천 지침에 가깝게 적혀 있습니다.
- 신앙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부처는 ‘와서 보라’고 했습니다.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해 보고 확인하라는 뜻입니다.
저는 위빠사나와 사마타로 시작해, 지금은 주로 생각을 내려놓는 방식(무념)으로 앉습니다. 경전은 처음으로 삼매라고 부를 만한 고요를 겪은 뒤에야 펼쳐 보았습니다. 그 과정은 경전을 펼치기 전까지에 적어 두었습니다.
나중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만, 지금의 저는 오늘날의 한국 불교를 제 종교로 믿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저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 가르침을 따라 수행해 보고 싶을 뿐입니다. 의례와 의례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고, 중요한 건 마음이지 겉치레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불교 안에는 수행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고, 종교적인 해석이 있어야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지옥이나, 인도 신화에서 들어온 야차와 수호신 같은 이야기에는 솔직히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처의 가르침은 다르다고 느낍니다. 종교적인 해석에 기대지 않아도 직접 수행해 보면, 깊이만 다를 뿐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부처를 존경하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을 다 받아들이기에는 제가 아직 부족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스스로를 가르침만 훔쳐 배우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주어진 역할은 다 하지 못하면서 가르침만 얻어 가고 있으니까요.
이 블로그가 다루지 않는 것
- 종교 의례와 신앙. 절하는 법, 기도, 기복은 다루지 않습니다.
- 특정 종파나 단체에 대한 평가. 다른 전통과의 차이는 설명하지만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 효과에 대한 약속. 명상이 병을 낫게 한다거나, 몇 주 만에 깨달음을 얻는다는 이야기는 쓰지 않습니다.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가
솔직히 처음 제가 명상에서 바란 것은 괴로움을 덜어 내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준비해 온 꿈의 일을 더 늦어지지 않게, 흔들림 없이 집중해서 해내고 싶었습니다. 명상은 그러기 위해 조금 더 나은 마음 상태에 머무는 수단이었습니다. 제가 바란 끝은 그 일을 문제없이, 온전한 마음으로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를 보고 달려들었는데, 가 보니 얻은 것이 훨씬 많았습니다. 화를 덜 내고, 걱정에 덜 끌려다니고,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기준이 조금씩 세워졌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제가 달라진 걸 느낀다고 말합니다. 생각도 조금 깊어졌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면 그 행동이 어떤 생각에서 시작됐는지 짐작하게 되고, 때로는 그 마음이 제게 옮겨 오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건 제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생각을 놓아주는 수행만 해도 닿을 수 있는 경험입니다.
그리고 이 블로그를 쓰며 품은 목표가 하나 더 있습니다. 경전은 생각이 가라앉은 뒤 마음이 한 곳에 고요하게 모이는 상태(삼매)와, ‘나’라고 붙잡을 것이 비어 있음을 보는 경험(공)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괴로움, 나아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앉으면서 ‘나’라고 할 것이 없는 무아와, 삼매라고 불리는 고요를 여러 번 겪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하룻밤에는 비어 있는 상태인 공에 여러 번 들어가 머물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 공의 문턱에는 여러 종류의 삼매가 지키고 있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다만 제가 본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고, 그 깊이도 아직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 고요에 이르는 것도 아직은 그날의 조건이 따라 주어야 하는 일입니다. 경전은 이런 경험을 내세우지 말고, 고요하게 머무는 상태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일러 줍니다. 그래서 이 경험은 누구에게 권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제가 본 만큼만 조심스럽게 기록하려고 합니다. 모두에게 와닿는 이야기는 아닐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이 블로그에는 두 길을 모두 기록하려고 합니다. 생활 속에서 앉아 본 이야기에서 시작해, 경전을 읽으며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본 기록으로 이어 가겠습니다.
시작해 보신다면
제 경험으로는 처음에는 하루 5분이면 충분했습니다. 5분만이라도 눈을 감고 생각을 놓아주는 연습을 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다만 욕심이 강하거나, 억울하거나, 화가 나 있거나, 몹시 피곤할 때는 생각을 놓기가 어렵습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 그럴 때는 먼저 충분히 쉬고 나서 천천히 생각을 놓아 보세요.
다음 글에는 제가 처음 앉기 시작했을 때의 자세와 시간, 그리고 잡념이 많을 때 해 본 것들을 적어 두려고 합니다.
이 글은 제 경험의 기록일 뿐이며, 명상은 의학적 치료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트라우마나 공황, 정신과 치료 중이라면 전문가와 먼저 상의해 주세요.
머물다 가는 한마디
잠시 머물다 가시며 남긴 한마디는 이곳에 다녀가신 자취로 소중히 읽겠습니다. 이곳은 대화를 나누는 자리라기보다 생각을 조용히 남겨 두는 자리여서, 답글은 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글을 읽고 든 생각이나 직접 겪은 경험, 그리고 제 생각이 잘못되었거나 경전을 잘못 읽은 부분이 있다면 편하게 남겨 주세요. 남겨 주신 글은 확인 후 공개됩니다.